답답할 때, 인생이 재미 없을 때,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고민이 있을 때, 힐링이 필요할 때 읽으면 좋아요.
#고독#비틀즈#사랑#상실#청춘
분량두꺼운 책
장르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출간일2017-08-07
페이지572쪽
10%17,000원
15,300원
분량두꺼운 책
장르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출간일2017-08-07
페이지5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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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두꺼운 책
장르1950년대 이후 일본소설
출간일2017-08-07
페이지572쪽
요약
독서 가이드
1. 이 책은 20대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에요.
2.심리에 관심이 많을 때 읽으면 도움이 돼요.
3.천천히 긴 호흡으로 읽으며 사색에 잠기기 좋은 분량이에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은이)
양억관
(옮긴이)
상세 정보
페이지를 처음 펼치는 오늘의 젊음들에게, 그리고 오랜 기억 속에 책의 한 구절을 간직하고 있는 어제의 젊음들에게, 한결같은 울림으로 예민하고 섬세한 청춘의 감성을 전하며 영원한 필독서로 사랑받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이다.
도서 DB 제공: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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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 어떻게 시작해 볼까요?
요약
노르웨이의 숲 내용 요약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1987년 일본에서 처음 출간된 장편소설로, 1989년 민음사에서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세계적인 작가로 알린 대표작으로, 1960년대 말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청춘의 사랑, 상실, 그리고 고독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 주인공 와타나베는 37세의 나이에 비행기 안에서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을 듣고 20대 초반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1968년, 대학에 입학한 19세의 자신으로 돌아가 친구 기즈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 노르웨이의 숲을 읽는 내내 이 한 문장이 계속 따라다녔다. 우리는 보통 삶과 죽음을 서로 반대되는 두 극단으로 그리는데, 죽음이 삶의 반대편이 아니라 삶 안에 처음부터 섞여 있는 성분이라면, 우리는 살아있는 매 순간에도 이미 얼마간의 죽음을 함께 데리고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와타나베는 친구 기즈키가 열일곱 살에 갑자기 자살한 뒤, 그의 연인이었던 나오코와 이상한 방식으로 가까워진다. 나오코 역시 기즈키의 죽음 이후 서서히 무너져가고, 결국 요양원에 들어간다. 나는 이 관계에서 흥미로웠던 지점이,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한 감정으로 가까워진 게 아니라 같은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 하나로 묶여 있다는 점이었다. 사랑이 두 사람만의 감정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상실을 함께 견디는 데서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 그렇다면 이런 사랑은 서로를 마주 보는 사랑이 아니라, 나란히 같은 빈자리를 바라보는 사랑에 가까웠다.
그러니 이 둘의 관계에는 처음부터 어떤 한계가 새겨져 있었던 셈이다. 마주 보는 사랑은 서로에게 다가갈수록 그 거리가 좁혀지지만, 나란히 같은 빈자리를 보는 사랑은 아무리 가까이 서 있어도 결국 각자 그 빈자리를 향해 서 있을 뿐, 서로를 향해 있지는 않다. 와타나베가 나오코에게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완전히 가닿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는지도 모른다. 둘 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지만, 그 시선의 종착지는 서로가 아니라 이미 사라진 기즈키였으니까.
미도리라는 인물도 오래 남았다. 나오코가 죽음 쪽으로 계속 가라앉는 인물이라면, 미도리는 철저하게 삶 쪽에 서 있다. 그녀는 슬픔 속에서도 밥을 먹고, 화를 내고, 욕망하고, 살아간다. 나는 이 대비에서 애도라는 게 하나의 정해진 얼굴만 갖는 게 아니라는 걸 배웠다. 나오코처럼 상실 앞에서 조용히 침잠하는 것도, 미도리처럼 그럼에도 계속 먹고 웃고 화내며 사는 것도 다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붙드는 태도였다. 앞서 읽은 문장을 다시 가져오면, 삶과 죽음이 애초에 분리된 게 아니라 늘 뒤섞여 있는 거라면, 나오코와 미도리는 서로 다른 극단이 아니라 그 뒤섞임의 양쪽 끝을 나눠 살아내고 있는 두 사람이었던 셈이다.
와타나베가 이 둘 사이에서 끝까지 흔들리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는 단순히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게 아니라, 죽음 쪽으로 계속 끌려가려는 마음과 그럼에도 살아야 한다는 마음, 이미 자기 안에 함께 섞여 있는 두 성분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상실을 겪은 사람에게 필요한 게 어느 한쪽을 완전히 선택하는 게 아니라 그 흔들림 자체를 견디는 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을 극복한다는 건 삶에서 죽음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내는 게 아니라, 그 둘이 뒤섞인 채로도 계속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애도의 끝에 어떤 완결된 상태를 상상한다. 눈물이 마르고, 그 사람의 부재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다시 온전한 나로 돌아가는 순간. 근데 이 소설은 그런 결승점을 아예 지도에서 지워버린다. 와타나베가 도달한 곳은 죽음을 이겨낸 자리가 아니라, 죽음과 삶이 계속 뒤섞인 채로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법을 익힌 자리였다. 그러니 그가 나오코와 미도리 사이에서 끝내 명쾌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풀어야 했던 건 두 여자 중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죽음을 끌어안은 채로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느냐는 문제였으니까. 그리고 그 문제에는 깔끔한 정답이 없다는 것, 그 정답 없음을 견디는 게 이 소설이 말하는 성숙이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내가 겪었던 상실들을 다시 떠올렸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나면 나는 늘 언제쯤 이 슬픔이 끝날까를 헤아렸다. 마치 정해진 기한이 있고, 그걸 넘기면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것처럼 여겼다. 근데 실제로 슬픔은 그리 간단히 작동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아무렇지 않다가도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그 사람이 훅 밀려왔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스스로를 다그치곤 했다. 근데 와타나베를 보면서, 그 밀려옴을 애써 외면하거나 밀어내려 하기보다는 그냥 그 순간에 완전히 붙들려도 괜찮다는 걸 알았다. 슬픔이 깨끗이 사라지는 날을 기다리는 대신, 어느 날은 그 사람 생각으로 하루가 온통 무너져도 괜찮다는 것.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슬퍼하고 애도하고 나면, 다음 날엔 다시 그 사람의 몫까지 짊어지고 살아가면 되는 거였다. 슬픔을 이겨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매번 그것과 싸워 이기려 하기보다, 어떤 날은 그냥 완전히 져주고 그다음 날 다시 일어나는 것. 어쩌면 그게 내가 그동안 잘못 세워두었던 애도의 기준을 다시 고쳐 쓰는 방법이었다.
소설 끝에서 와타나베는 전화 부스 안에서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미도리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이제 이 장면을 조금 다르게 읽는다. 그는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슬픔에 완전히 무너졌던 그 하루들을 지나 다시 누군가를 부를 수 있는 자리로 돌아온 거였다.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몰라도, 그 불확실함 속에서 그는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이 마지막 부름이 슬픔을 다 극복했다는 증거라기보다, 계속 흔들리면서도 계속 살아가겠다는 아주 소박한 다짐처럼 느껴졌다. 이 책을 통해 상실의 슬픔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해도 괜찮다고, 흔들리는 채로도 다시 사람 곁으로 걸어갈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위로를 받은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