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울 때, 인생이 재미 없을 때, 일상의 재미를 원할 때, 힐링이 필요할 때 읽으면 좋아요.
#신뢰#아비규환#에곤쉴레#인간의내면#인간존재#자아#지나간다
분량얇은 책
장르1950년대 이전 일본소설
출간일2004-05-15
페이지191쪽
10%9,000원
8,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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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1950년대 이전 일본소설
출간일2004-05-15
페이지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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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얇은 책
장르1950년대 이전 일본소설
출간일2004-05-15
페이지191쪽
요약
독서 가이드
1. 이 책은 20대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이에요.
2.외로울 때일 때 읽으면 도움이 돼요.
3.한 번 자리에 앉아 끝까지 읽어내려가기 좋은 분량이에요.
작가
다자이 오사무
(지은이)
김춘미
(옮긴이)
상세 정보
자살 미수와 약물 중독, 39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인간 실격>이 출간됐다. 오직 순수함만을 갈망하는 한 젊은이가 파멸해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뉴욕 타임스는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데 있어 다자이보다 뛰어난 작가는 드물다'고 평했다.
도서 DB 제공: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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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인간 실격 내용 요약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자전적 요소가 강한 소설로, 주인공 요조의 파멸적인 삶을 통해 인간성의 상실을 그린다. 이야기는 요조의 유서와 세 개의 수기 형식으로 전개된다. 어린 시절부터 요조는 타인과 소통하지 못하고,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광대짓"을 하며 살아간다. 그는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웃음을 짓지만, 내면은 깊은 고독과 공허로 가득하다. 학교 시절, 그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고, 술과 여자에 빠져든다. 성인이 된 요조는 한 여자와 동거하며 잠시 안정을 찾지만, 그녀의 배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내 왔습니다. 인간 실격은 이 한 문장으로 이미 결론을 다 말해버리고 시작하는 소설이었다. 그다음에 이어지는 모든 장면은 사실 이 문장을 증명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요조가 태어나서부터 정신병원에 갇히기까지, 소설이 그리는 건 성장이 아니라 이 첫 문장이 어떻게 처음부터 이미 확정된 결말이었는지를 확인해가는 여정이었다.
요조는 어릴 때부터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정확히는, 사람들이 진심과 다른 말을 하며 살아간다는 그 흔하디흔한 위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배고프지 않아도 밥을 먹는다는 것, 슬프지 않아도 슬픈 척을 한다는 것 앞에서 그는 매번 진심으로 당황한다. 그래서 그가 찾아낸 생존법이 어릿광대짓이었다. 상대가 원하는 반응을 미리 계산해서 연기하는 것.
나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흔히 사회성이라 부르는 것의 정체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사회성이란 보통 타인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능력이라고 배우는데, 요조에게 사회성은 정반대의 것이었다. 진심을 숨기고 상대가 원하는 얼굴을 미리 예측해서 보여주는 기술. 그런데 이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상대를 아주 깊이 관찰해야 한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말에 웃고 어떤 말에 상처받는지를 남들보다 훨씬 예민하게 읽어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요조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반응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 이해가 관계로 이어지지 않고, 오직 자신을 감추기 위한 데이터로만 소비됐다는 게 비극이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관찰과 관계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랄 수 있다는 걸 처음 실감했다. 누군가를 세심하게 살핀다는 게 자동으로 그 사람과 가까워진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를 정확히 읽어내려는 집중력이 온전히 나를 보호하는 데만 쓰이면, 그 관찰은 관계를 쌓는 다리가 아니라 관계로부터 나를 숨기는 벽이 되어버린다. 요조가 평생 쌓아온 건 관계가 아니라, 관계처럼 보이는 정교한 거리였다.
그가 사람들 곁에서 웃고, 사랑받고, 누군가의 곁을 지켰던 그 모든 시간들이 실은 진짜 가까워짐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쌓여가고 있었다는 게 소름 끼쳤다. 겉에서 보면 그는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근데 그 거리를 정교하게 유지하는 데 자신의 모든 감각을 쏟아부었다는 점에서, 그는 오히려 그 누구보다 철저하게 혼자였다. 다가가는 몸짓과 숨는 몸짓이 겉으로는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는 게 이 소설이 던진 가장 무서운 발견이었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와 함께 웃고 대화를 나누는 걸 관계가 쌓이는 증거로 여기지만, 그 웃음과 대화가 사실은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기 위한 아주 정교한 안무일 수도 있다는 것. 요조는 그 안무를 세상 누구보다 완벽하게 해냈고, 그래서 세상 누구보다 철저하게 혼자 남았다.
그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잘 통했다. 사람들은 요조를 사랑했고, 여러 여성들이 그의 곁을 자처했다. 근데 정작 그 사랑을 받는 동안 요조는 술과 약물에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함께 동반자살을 시도했던 쓰네코는 죽고 그만 홀로 살아남았고, 그를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여성들도 결국 그와 얽히며 각자의 방식으로 무너져 갔다. 나는 이 대목에서 사랑받는다는 것과 채워진다는 것이 얼마나 다른 일인지를 생각하게 됐다. 요조는 사랑을 거절당한 적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늘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근데 그 사랑이 그의 결핍을 조금도 메우지 못했다. 결핍이란 부족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것을 받아들일 자리를 자기 안에 마련해두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쏟아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요조는 사랑을 연기하는 법은 완벽하게 알았지만,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은 배운 적이 없었다.
이 결핍은 특정한 사건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그의 존재 방식 자체에 가까웠다. 우울이라는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보통 우울을 어떤 상실이나 실패 뒤에 찾아오는 감정으로 이해한다. 무언가를 잃었기 때문에, 무언가에 실패했기 때문에 우울해진다고. 근데 요조의 우울은 이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잃을 게 있어서 우울한 게 아니라, 애초에 자기 자신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우울했다. 상실이라는 게 원래 무언가를 소유했던 사람만 겪을 수 있는 경험이라면, 요조에게는 그 자격조차 없었다.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가져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그의 우울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애초에 가져본 적 없는 것을 향한 오래된 결핍이었다.
인간 실격. 자격을 잃었다는 말은 한때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전제한다. 근데 요조는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잃은 게 아니라, 애초에 그 자격을 손에 쥐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인간들 틈에서 인간의 흉내를 내며 평생을 살았을 뿐, 단 한 번도 스스로 인간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제목은 상실의 기록이 아니라, 애초에 주어진 적 없는 자격에 대한 뒤늦은 확인이었던 셈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우울과 결핍이라는 감정을 사건이 아니라 나이테 같은 것으로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나이테는 나무가 어느 날 갑자기 새기는 게 아니라, 자라나는 매 순간이 조용히 겹겹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요조의 결핍도 그랬다. 어느 하루의 상처가 만든 게 아니라, 태어난 순간부터 매일 아주 조금씩 쌓여서 그의 안쪽 가장 깊은 곳에 나이테처럼 새겨진 것이었다. 그러니 그의 비극은 그 결핍을 극복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결핍이 이미 그를 이루는 나이테 그 자체였다는 데 있었다. 나이테를 도려내면 나무가 사라지듯, 요조에게서 그 결핍을 도려내면 남는 건 요조가 아니었다.
이 소설을 덮으면서 나는 내 안에도 그런 나이테가 몇 겹쯤 있을지 헤아려보게 됐다.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상처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조용히 쌓여오다가 어느 순간 겉으로 드러났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인간 실격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이어졌다. 자격이라는 말이 원래 누군가 부여하고 판정하는 것이라면, 요조가 스스로에게 실격을 선고한 그 순간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격을 판정하는 존재가 되어본다는 것, 그것도 자기 자신을 향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인간이기를 실패한 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자격이라는 개념을 가장 철저하게 실천하다가 스스로 그 심판대에 올라간 사람이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자격을 따지는 마음 자체가 어쩌면 인간이 짊어진 가장 근원적인 형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은 자신에게 살아갈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그런 질문을 만들어내고, 그 질문 앞에서 스스로를 탈락시킬 수 있다. 그러니 요조가 인간 실격을 선언한 그 순간은, 역설적으로 그가 얼마나 인간이라는 조건에 깊이 붙들려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읽기 힘들었다. 작품을 읽는 내내 유서를 읽는 기분이었다. 자기가 왜 죽을 수 밖에 없었는지 어떤 부분에서 본인이 크게 죄의식을 느꼈는지 사건만 적고싶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소심하게 적어놓은 변명(자기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들을 보며 그렇게 느꼈다. 요조가 죄의식을 느끼는 부분들은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번쯤 스치듯 느꼈던 찝찝함일 것이다. 기부하는 것을 거절하면 괜히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처럼. 요조는 그러한 모든것을 기분을 떠나 실제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싶다.
나는 살고싶은 마음에 그런 죄의식을 모른체하고 사는 사람에 가깝다. 나도 스스로 죄책감을 쓸데없을 정도로 크게 느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요조만큼은 아니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죄책감을 크게 느끼면 오히려 죄인이 된다. 나는 이미 죄책감을 느끼게 한 사건을 통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나는 더러워졌고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상대에게 혹은 세상에게 상처를 주었는데 아무리 상대가 용서하거나 심지어 그 사건에 대해 잊어도 사건이 이미 일어났음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나는 평생 죄인이다. 사람이 단 한번도 잘못을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작중에 지옥의 존재는 믿어도 천국의 존재는 믿을 수 없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있다. 어릴 적부터(진짜 어릴때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을때) 생각했었다. 천국의 문턱은 어느정도일까. 엄마 지갑에서 돈을 훔쳐다 떡볶이를 사먹는건? 학원을 빼먹는건? 거짓말을 하는건? 들킨 거짓말과 들키지 않은 거짓말의 무게는 다를까? 사실 이런 질문은 평생 답을 내릴 수 없다. 스스로 내린 답은 대답이지 정답이 아니다. 해결되지 않는 죄책감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