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은 도스토옙스키가 태어난 지 200년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만지에서는 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출간을 시작한다. 그 첫 번째가 ≪죄와 벌≫이다. 역자는 오류 없는 번역을 하기 위해 초심으로 돌아가 고군분투한 끝에 그 어떤 번역본보다 정확하면서도 말로 설명하듯 쉬운 현대적인 번역을 해냈다.
죄와 벌. 제목부터가 이미 하나의 명제였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다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당연한 그 인과율. 처음엔 그 제목이 그냥 이야기의 골격을 미리 알려주는 정도라고 생각했다. 죄가 있고, 그다음엔 벌이 따라온다는 순서. 근데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니, 그 당연해 보이는 인과율이 실제로는 우리가 상상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벌이라는 게 법정에서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노파를 죽인 바로 그 밤부터, 아니 어쩌면 그 살인을 계획하던 순간부터 이미 벌 속에 들어가 있었다. 열병과 환각, 스스로를 향한 끝없는 심문,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것만 같은 그 편집증적인 공포. 법이 그를 심판하기 한참 전에,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 속에서 매일 형을 살고 있었던 셈이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한 대학생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범인, 그러니까 평범한 사람과 비범인, 즉 평범하지 않은 소수로 나뉜다는 자기만의 사상을 품고 있다. 비범인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라면 그 과정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다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인데, 그는 자기가 정말 그런 비범인인지 시험해보기 위해 전당포 노파 알료나를 살해한다. 처음 이 살해 동기를 읽으면서 소름이 끼쳤다. 돈이 급해서도, 원한이 있어서도 아니고, 순전히 자기 사상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으로 사람을 죽인다는 것. 나폴레옹 같은 인물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도 역사의 위인으로 남는다면, 자신도 그렇게 이 세상의 법칙 바깥에 설 수 있는 존재인지를 스스로 확인하고 싶었던 거였다.
근데 그 계획에는 없던 변수가 하나 생긴다. 노파를 죽이려던 바로 그 순간, 하필 여동생 리자베타가 돌아오고, 라스콜니코프는 얼떨결에 그녀까지 함께 죽이고 만다. 이 우발적인 두 번째 살인이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균열의 시작이었다. 자기 사상을 증명하기 위한 냉철하고 계획적인 실험이라고 믿었던 그 행위가, 사실은 통제할 수 없는 우연과 혼란 속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라스콜니코프는 극심한 열병과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하려 애쓴다. 자신은 비범인이니 이 죄책감쯤은 극복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치지만, 정작 몸과 마음은 그 다그침과 정반대 방향으로 무너져간다. 이 대목이 정말 정교하게 느껴졌다. 사상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와, 그 사상으로도 도저히 가라앉지 않는 양심 사이의 간극.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간극을 몇백 페이지에 걸쳐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인간의 머릿속 논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결국 몸과 감정을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다는 걸 계속 증명해나간다.
이 소설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소냐였다. 무능한 아버지와 그를 몰아세우는 계모, 그리고 극심한 생활고 때문에 결국 매춘부로 살아가게 된 여성. 세상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할 처지인데, 정작 라스콜니코프 앞에서 그녀는 누구보다 순수하고 흔들림 없는 신앙을 지닌 사람으로 서 있다.
라스콜니코프가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때도 소냐는 그를 비난하거나 등을 돌리지 않는다. 대신 광장에 나가 땅에 입 맞추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살인자라고 외치라고 말한다. 도망치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 죄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날 때 정말로 그 뒤를 따라간다. 나는 이 인물을 통해 이 소설이 말하려던 진짜 구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소냐가 그를 구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 자신도 이미 밑바닥까지 떨어져 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살인자와 매춘부, 소설 속 다른 인물들 눈에는 둘 다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처지였다. 근데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렇게 세상이 죄인이라 낙인찍은 소냐를 통해서, 진짜 죄인인 라스콜니코프를 구원한다. 이 역설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바닥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않고 그 옆에서 죄를 함께 짊어져 줄 수 있다는 것.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나만큼 무너져본 사람이 곁에 있어줄 때 비로소 사람은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는 걸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됐다.
법이 정한 처벌을 받는 것과, 진짜 죄를 마주하고 뉘우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라스콜니코프에게 진짜 벌은 감옥도 유형도 아니었다.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스스로 정신이 옭아매이고, 세상 모든 사람과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아가야 했던 그 상태 자체가 이미 벌이었다.
그러니까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결말은 그가 마침내 벌을 받기 시작하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오랜 벌에서 조금씩 풀려나기 시작하는 순간에 더 가까웠다. 법적인 형량은 그제야 시작됐지만, 정작 그를 짓누르던 진짜 무게는 소냐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사람들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기로 한 순간부터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다. 처벌과 구원이 이렇게 정반대의 방향에서 동시에 시작될 수 있다는 걸, 이 소설은 마지막까지 놓지 않고 보여준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 곱씹었던 건, 사람이 머리로 만들어낸 논리가 몸과 마음까지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누구보다 정교하게 자기 사상을 구축했지만, 정작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는 그 어떤 논리로도 자신을 다독일 수 없었다. 이성이 아무리 완벽한 체계를 세워도, 인간이라는 존재 안에는 그 체계로 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걸 이 소설은 지독할 만큼 집요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 지점에서 죄와 벌이라는 제목을 다시 곱씹게 됐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그 단순한 인과율이, 사실은 법정이나 감옥 훨씬 이전, 마음속에서 먼저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 나도 살면서 뭔가를 스스로에게 정당화하려 애썼던 순간들이 있다. 논리적으로는 완벽하게 말이 되는 것 같았는데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던 적들. 그 불편함을 못 본 척 넘어가려 했던 순간과, 결국 인정하고 받아들였던 순간의 차이가 지금의 나를 조금씩 만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불편함을 무시하고 지나간 날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지만, 사실 그 순간 이미 나는 작은 벌 하나를 스스로에게 선고하고 있었던 셈이다.
라스콜니코프가 결국 자수를 택하고, 시베리아에서야 비로소 소냐 앞에서 조금씩 인간다움을 되찾아가는 결말을 보면서, 이 소설의 제목이 뜻하는 벌이 결국 처벌이 아니라 정직함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법이 내리는 벌은 죄에 대한 사회의 답이지만, 진짜 벌은 스스로 그 죄를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기 전까지 계속되는 그 단절과 불안이었다. 그러니 죄와 벌은 순서대로 오는 두 사건이 아니라, 사실은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자라나는 하나의 감정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벌을 스스로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밖에서 오는 어떤 심판이 아니라 결국 자기 안에서 스스로 죄를 인정하는 그 한순간뿐이었는지도 모른다.